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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의 봄

이승숙 | 2014.03.18 06:59 | 조회 2075

 

 

우리 조상님들은 어른이 되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아명(兒名)으로 불리지만, 어른이 되면 자(字)나 호(號)로 서로 불렀다. 일반 백성들 역시 이름을 소중히 여겨 어른들끼리는 서로 부르는 호칭이 따로 있었다. 양반들처럼 자를 짓거나 호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각자 불리는 이름이 있었으니 택호(宅號)가 바로 그것이다.

택호란 이름 대신에 집주인의 벼슬 이름이나 고향 지명 따위를 붙여서 그 사람의 집을 부르는 말이다. 농촌의 경우에는 선대 때부터 오래 한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근방의 사람들은 얼마큼씩은 서로 알고 지냈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그 집 가장의 처가동네를 따서 택호를 지었다. 예를 들어 필자의 친정아버지는 '이살 양반' 또는 '이살 아제'로 통했다. 아버지의 아내인 우리 친정어머니 고향이 경북 청도군의 '이살'이란 동네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렇게 불리웠다. 또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어머니는 '이살띠기(댁)'였고 또 '이살 아지매'이기도 했다. 

택호로 다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예전 사람들에게는 이름 이외에도 따로 부르는 택호가 있었다. 택호만 들어도 그 집이 어떤 집인지 또는 어느 가문과 통혼(通婚)을 맺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예전 분들은 각자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가와 처가 또는 시댁과 친정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니 처신을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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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나들길 14코스는 강화읍 용흥궁에서 철종의 외갓집이 있는 선원면까지 가는 길입니다.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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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사람들에게 호(號)가 있었다면 요즘 사람들에게는 '닉네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인터넷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 본명보다는 가명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지은 이름을 '닉네임'이라고 한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닉네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호처럼 쓰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신경을 쓰서 별칭을 만드는데 그것은 닉네임이 보이지 않는 사이버 세계에서 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강화도령'이라고 자신의 별칭을 지은 사람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가 있으니 그것은 강화도령이 강화도에서 살다가 임금이 된 철종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닉네임이 강화도령인 그 사람 역시 강화도가 고향이고 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경상도 처자와 연을 맺은 '강화도령'은 어느 해에 돌잡이 아들을 데리고 처가로 인사를 갔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외손자를 보자 장모님이 단걸음에 뛰어나와 아기를 덥석 안으며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우리 강화도령 오셨는가"였다. 강화도 사위와 외손자에게 이보다 더 단순명쾌한 인사말이 있을까.

'강화도령'은 조선시대 25대 왕인 철종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 스물일곱 분의 임금님 중에서 철종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왕이 또 있을까. 왕족이지만,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희박하던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철종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시중에는 온당치 않은 말들도 떠돌아다니고 있다. 예를 들면 철종이 일자무식이었다거나 나무를 해서 먹고 살았다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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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 어진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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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순조 재위 31년인 183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왕손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으니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 소양을 갖추는 교육은 받았다. 왕이 된 후에 사가(私家)에 있을 때의 교육 정도를 묻는 질문에 '소학'까지 배웠다고 철종은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철종이 일자무식인 것처럼 시중에는 알려져 있다.

또 강화도에서 태어난 것처럼 오해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철종이 강화에서 산 기간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는다. 14살에 강화로 와서 19살에 왕이 되어 도성으로 돌아갔으니 철종의 강화도살이는 5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가 살았던 집을 '생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생가란 태어나서 자란 곳을 뜻하는 말일 것이니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은 생가가 아니다. 그곳은 그의 아버지가 유배를 와서 살았던 집이었으며 아버지와 큰 형님이 역모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하고 난 뒤 철종, 곧 원범과 그의 작은 형이 와서 살았던 곳일 뿐이다.

강화도령은 뒷배경이 없었다

사람들은 '강화도령'이란 별칭으로 철종을 불렀다. 곧 '강화도 총각'이니 이 얼마나 친근한 표현인가. 철종은 태생부터 우리네와 다른 별천지의 사람이 아니라 강화도에 살던 보통 총각이었으니 마치 이웃사람이라도 되는 듯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 그가 왕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일종의 친근한 마음에 또 경이감까지 담아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강화도령'은 또 다른 의미로도 쓰였을 것 같다. 권력을 잡고 있던 세도가들은 한갓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가 자신들의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철종의 출생 배경을 낮춰 '강화도령'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숙이기가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꼽고 더럽지만 어쩔 수 없이 숙여 들어가야 할 때 우리는 속으로 상대를 비꼬면서 자신을 합리화 한다. 철종 시대의 세도가들 역시 비슷했을 것 같다. 물론 절대왕정 시대이니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비아냥대면서 '강화도령'이라고 낮춰 부르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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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에 지은 집인 '용흥궁'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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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백성들은 달랐을 것이다. 태생부터 좋은 가문에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사람들은 평민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구중궁궐에 사는 임금님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철종은 달랐다. 그는 14살부터 19살까지 강화도에서 살면서 백성의 삶을 체험했다. 보통의 평민들처럼 땔나무를 하러 산에도 가고 또 어쩌면 농사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백성들은 철종을 자기들과 동일시해서 '강화도령'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지 않았을까.

철종의 어릴 때 이름은 '원범'이었다. 원범은 열아홉 살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갔다. 조혼의 풍습이 있던 조선시대에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못 갔다는 것은 그에게 심각한 결격사유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없는 집에, 그것도 역모로 몰려 죽은 집에 딸을 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원범은 혼기가 차도록 장가를 못 갔을 것이다.

왕으로 등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철종은 보통 평민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농사는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워야 일머리도 알고 몸에도 익는 법인데 철종은 14 살이 되도록 한양에서 살았으니 언제 농사를 배웠겠는가. 땔나무 역시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무 한 짐인들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원범이었으니 강화에서의 삶이 무척 힘겨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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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년에 찍은 강화읍의 강화성공회성당 근처 모습입니다. 성당 인근에 용흥궁이 있는데 사진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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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철종실록'에는 동네의 무뢰배가 술에 취해 원범에게 말을 함부로 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원범에게 힘이 있었다면 어찌 함부로 할 수 있었겠는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왕손에게 동네 사람이 그렇게 불손한 언행을 했다는 것은 당시 원범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하고 딱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 어찌 강화를 잊겠는가

원범은 뒤를 봐줄 배경이 없었다. 그는 소위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었다. 조선시대는 한 스승밑에서 배운 사람들끼리 학맥을 이어가면서 세력을 넓히는 시대였는데 원범은 그런 학맥 역시 없었다. 또 혼인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결속하던 시대였는데 원범의 집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인 전계군은 강화도에 유배 왔다가 그곳의 처녀와 결혼을 했다. 더구나 원범의 외삼촌은 대를 이을 손을 남기지 못해서 원범에게는 외사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변변하게 내세울 외가 쪽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단단하게 구축이 되어 있는 기성 정치권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맨 몸으로 부딪히며 견디어 나간 사람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강화도령'이라는 말 속에는 기득권 세력들의 비아냥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성들은 철종에게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아실 임금님이니 분명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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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이 왕이 되고 나서 4년 후에 지은 철종의 외갓집입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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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제 뜻을 다 펼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한 부분이 철종실록에는 담겨 있다. 또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살았던 강화도에 대한 특별한 마음 역시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부모님을 다 잃고 사고무친한 자신을 거두어준 강화였기 때문이었을까. 철종은 강화도 주민들만을 위한 특혜를 베푼다.

"내가 강화부에 어찌 특혜를 입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과 곡식과 묵은 세금 빚 가운데 징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없애 주고,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강화유수로 하여금 조정과 상의하여 그 장점을 따라 조치하도록 하라." <철종실록>

또 철종 4년에는 강화도의 유생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특별과거를 시행하도록 하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조선은 이미 속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더구나 철종은 힘이 없는 왕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용흥궁의 봄

꽃샘추위가 찾아왔던 삼월의 어느 날, 용흥궁으로 들어서는 좁은 골목에는 따스하게 양광(陽光)이 비추었다. 용흥궁의 마당에도 햇살은 빼꼼히 얼굴을 들이민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 그런지 햇살은 방 안으로는 들어가지를 못하고 마당에서만 서성이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훈훈한 기운이 도는데 용흥궁은 사람이 살지 않아서 그런지 휑뎅그렁하다. 마루에도 찬 기운이 돌아서 선뜻 올라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보존되고 있는 옛 집들을 가보면 훈기가 돌지 않아 마치 박제를 해놓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용흥궁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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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나들길 카페'의 수요도보팀이 '임금님의 첫사랑길'을 걸으며 용흥궁에 왔습니다.
ⓒ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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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은 지 약 150년이 된 용흥궁이 옛 모습을 그나마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몇십 년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덕분이었다. 50여 년 전만 해도 용흥궁에는 대여섯 가구의 사람들이 복닥대며 살았다고 한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어릴 때 용흥궁이 집인 친구네 집에 놀러도 다녔는데, 안채며 바깥채 그리고 행랑채 등 각 건물마다 따로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그랬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도 당시에는 물이 풍부해서 대여섯 가구의 사람들이 다 그 물을 먹었다고 그이는 말했다.

생전에 강화를 위해 특별한 마음을 낸 것처럼 사후에도 이렇게 강화 사람들에게 곁을 주었던 철종이었다. 그는 비록 초가에서 옹색하게 살았지만 왕이 된 덕분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강화에 남겼다. 초가삼간 집이었다면 어찌 대여섯 가구씩이나 그 집에 깃들어 살 수 있었겠는가. 비록 역사책에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져 있지만 강화도 사람들에게 그는 특별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햇살이 머무르는 용흥궁의 담장 아래에는 복수초가 막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복수초의 노란 꽃잎이 대견하게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용흥궁에도 봄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용이 되어 떠난 원범(철종)이 잠시 놀러오기라도 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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