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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시계의 길

함민복 | 2016.05.23 05:14 | 조회 440

둥근 시계의 길


1.

   어둠 속에서 벽시계 소리가 들린다. 누가 보지 않아도 시계는 시간만을 독서하며 필사하는 노역에 종사 중이다. 혹 소리만 내고 가만히 멈춰 서서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누군가 보기 직전, 싹- 움직이는 건 아닐까? 아니다. 저건 분명 시간이 가는 소리다. 시간이 가는 소리 아닌 소리가 어디 있을까. 오리 울음소리도, 갑판 위로 잡아 올린 조기 울음소리도, 민망한 방귀소리도 심지어는 침묵의 소리마저도 시간이 가는 소리 아닌가. 모든 소리는 시간이 가는 소리다.


  시간에는 빈틈이 없다. 시간이 가는 길에는 걸림돌도 없고 비탈도 없다. 죽- 연결되어 있는 시간을 끊어 읽는 것을 보면 시계는 말더듬이인가 보다. 시계는 부자다. 시간이 곳간에 가득 차 있나 보다. 시간이 마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계는 시간을 헤프게 퍼 쓰지도 않고 시간을 축적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시계는 시간에 관한 한 완벽한 무소유자다.


2.

   시계도 밥을 먹는다. 밥이 떨어지면 죽는다. 다시 밥을 주면 죽었던 시간을 털어내고 바로 살아난다. 빛을 먹는 해시계, 중력을 먹는 물시계, 장력이나 탄성력을 먹는 기계시계, 전기를 먹는 전자시계 등의, 시계들은 대개 한 가지 밥을 먹는다. 편식한다. 시계의 밥 건전지에 혀끝을 대보았다. 시큰 짜릿했다. 별난 식성에 침이 고였다.


3.

태엽의 힘으로 가는 괘종시계의 식사는 좀 걸다. 태엽을 감을수록 힘이 점점 더 든다. 어려서 큰 집에 살 때 집의 일부를 떼어 팔았다. 정부시책(선심공약)으로 거기에 경로당이 들어섰다. 노인들이 돌아간 밤 괘종시계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다. 앙상한 손가락으로 시계 밥을 주던 노인이 죽어 상여가 나가던 날, 텅 빈 경로당의 시계는 더 낮고 길게 시간을 울었다. 괘종시계 불알에 얼비쳤던 노인들 얼굴이 노인들 냄새가 되어 대기 속으로 흩어지는 것 같았다. 경로당집 시절로 돌아가면 이규도 시인의 <경로당>이란 짧은 시가 떠올라 자주 읊조려보게 된다.

    

저승 가는 간이역 같다

나는 죽었나 목침을 돋아 베는

노인의 밤


4.

   산수 시간에 시계 보는 법을 몰라 나머지 공부를 했다. 집에 시계가 있는 애들이 어처구니없어했다. 시험지 속에서도 시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에, 미운 마음에 멈춘 시계를 그려보았다.

5.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다. 월급을 타 방수가 잘된다고 물속에 담가놓고 파는 시계를 하나 샀다. 이상하게도 물속에 담갔을 때도 습기가 차지 않던 시계 속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퇴근길에 습기 찬 시계를 풀어 주머니에 넣고 낯선 여성에게 다가가 시간을 물어보았다. 숫기가 너무 없는 나 자신을 개조해보자는 고심 끝에 내린 처방의 일환이었다.

   수작을 걸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당황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수작을 안 걸어 실망하는 여자들도 있을 거라고 자위했다. 차도가 있는 듯도 했다.


6.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아 형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랫목에 누운 아버지가 두 번 시간을 물었다. 형이 왜 안 오느냐고 했다. 목이 마르다고 해 전기밥솥을 열고 데운 베지밀 병을 꺼내 따 드렸다. 힘들게 앉은 아버지가 베지밀 병을 내려놓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아버지가 좌탈입멸하고 십 분쯤 지난 후 형이 왔고 이상하게도 시계가 멈춰 있었다. 그 후 오 년간 베지밀을 먹지 않았고 지금도 시계가 멈추면 불길한 생각이 앞선다.


  아버지의 일생은 결국 자식인 나의 시계태엽을 감아준 게 아니었을까.


7.

   새벽. 내가 일어나는 기척에 아내가 뒤척인다. 휴대전화를 열어보며 네 시간 잠잘 시간을 더 주겠다고, 내 것도 아닌 시간을 가지고 선심을 쓴다.


8.

   시계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명령도 지시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시계를 보며, 무슨 계시나 영감을 받는지 행동을 취할 뿐이다. 시계는 일상의 절도를 관장하고 매듭짓는다. 시계는 삶을 지휘하는 지휘자인가 보다.


9.

   시계가 없다면 약속은 느슨해지고 기다림은 풍성해질 것이다. 시계가 없어도 시간은 갈 텐데……. 시계는 쓸데없는 헛발질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선각자인가.

할머니가 빈 유모차를 밀며 구부러지는 허리를 두 시 반으로 지탱하며 천천히 길을 가고 있다.


10.

   도처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물은 흐르는 시계고 꽃은 피어나는 시계고 사람은 늙어가는 시계고 철새는 날아가는 시계고 바람은 불어가는 시계다. 생명들도 생명 아닌 것들도 다 무엇인가의 시계이며 거대한 우주라는 시계의 부품이다.


  둥근 시계가 시간이라는 관념의 바퀴를 돌리며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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